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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반란의 도시 : 데이비드 하비

세세생생 2017. 4. 28. 20:24


  최근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현상의 촉발은 싸이가 건물주로 있는 빌딩에서 테이크아웃드로잉에 대한 퇴거요구였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에서 저소득층이 모여사는 공간에 자본이 들어오며 저소득층을 몰아내는 현상을 말한다.  자본유입의 원인을 가난한 예술가등등의 미학을 짚어 이야기하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자본유입은 다양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스스로 증식할 수 있는 가치가 엿보인다면 어디든 흘러들어가는 것이 자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도시라는 공간에서 역사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다.  굳이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처지를 언급하지 않아도, 파리와 뉴욕과 같은 전 세계 도시의 역사 안에서, 올해 브라질 올림픽을 준비하는 리우데자네이루의 빈민가에서의 폭압과 서울의 구룡마을이나 경리단 길, 제주 바오젠거리 등등을 둘러싼 갈등같은 평행의 시간 위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공간안에서 벌어지는 일상이나 다름없는 현상이다. 

  현대사회에서 도시공간이란 자본의 가치증식에 매우 훌륭한 토양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달라진 건 자본증식의 방식이다.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도시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공장노동자를 형성하는 빈민들의 공간은 열악과 비참의 모습은 방관된 채, 존중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도시의 존재방식이 부동산과 3차 산업등으로 변화하면서 빈민의 공간은 자본증식의 필수요소에서 먹잇감 신세로 전락되었다.  과잉축적된 자본이 투자와 증식을 위해 노리는 대상이 도시빈민층의 거주공간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분배는 매우 불공평하다는 점을 상기하면, 젠트리피케이션은 극소수의 가진자들이 대다수 빈민에게 제도적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도시의 역사는 항상 이런 수순이었다.  그게 자본의 흐름과 증식에 따른 어느정도는 자연적인 현상이기도 했지만, 프랑스 파리의 경우, 도시의 미관을 재설계한다는 명목으로 정부권력이 도심의 빈민들을 폭력적으로 몰아내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한 역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1970년대 초, 서울 도심을 개발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로 강제 집단이주를 당한 빈민들이 벌인 광주 대단지 투쟁이 있었고, 80년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빌미로 도시개발이 진행되며 내몰린 빈민들의 이야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서울 봉천동과 난곡 재개발의 중심에서 어디로 흩어진건지 알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서러움은 현재진행형이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용산재개발 과정에서 공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맞고 불태워진 5명의 죽음을 기억한다. 

  2008년의 세계 경제위기를 초래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역시 자본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제한적인 주택담보 대출을 제공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결론은 주택담보 대출을 받은 가난한 사람들은 대출금을 갚을 능력이 없어 구입했던 주택들을 모두 저당잡힌 채 쫓겨났고, 부실대출을 무차별적으로 제공했던 금융권력은 합당한 처벌과 책임의무는 커녕 오히려 정부지원을 받아 회생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본의 불안은 어떻게든 뒤덮인 채, 도시라는 공간 안에서 증식을 위해 먹잇감을 노린다.  희생자들 역시 변함이 없다.  여전히 대다수의 자본력없는 사람들과 빈민들인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의 설명과 주장이 사실 쉽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깊은 통찰이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려면 경제와 사회사에 대한 어느정도의 이해가 필요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너무 어려운 이야기들로만 머리를 쥐어짜게 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도시에 대한 권리를 회복함에 있어 데이비드 하비가 주목하고 제안하는 바는 어렵지 않다.  일단 그는 현재의 자본주의와 도시시스템 하에서 제도의 수정을 요구하거나 새로운 제도를 제안하지도 않는다.  현상의 결과에서 대안을 제시한다.  전통적인 빈민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에서 자본흐름에 편승하기조차도 힘들어진 프레카리아트의 출현과, 도시의 자본력이 쉽게 손을 뻗지 못하는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이 대안의 시작이라 본다.  금융위기에 저항하는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은 거리와 공원에서 이루어졌고, 구성원들은 취업과 자본활동이 점점 더 어려워진 대학생들이 중심이었다는 데에서 데이비드 하비가 주장하는 대안은 설득력을 갖는다.  한마디로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해 자본의 마수를 억제할 수 있고 제도를 전복하며 도시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 이야기한다.  대안의 가능성은 점점 더 높아질 수 밖에 없다.  프레카리아트는 점점 증가할 수 밖에 없고 도심은 공공재의 성격을 가진 공간을 시민들에게 제공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테이크아웃드로잉 사태와 제주 바오젠거리에서 벌어지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서 우리는 대안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저항의 힘을 키우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용산참사는 이후의 시간에서 우리는 순응과 무기력만 키우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었고, 권력의 교활함만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도시의 변화에서, 대다수 시민이 피해자의 입장일 수 밖에 없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움직이지 않는걸까? 아니 움직일 수 없는 것일까?  데이비드 하비의 대안에 공감하면서도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참 멀고도 멀다라는 느낌만 가득해지는 현실은 답답하다.  내가 사는 사회엔 저항의 잠재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이미 제도에 철저하게 제압당한 것일까?

출처 : 칼을 벼리다.
글쓴이 : 민욱아빠 원글보기
메모 : 하비의 [도시의 반란]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