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론 또는 포스트성장론이 사상사 계보학을 정리하는 것을 보게 되면 칼 폴라니를 포함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스페인학자 칼리스 등이 편찬한 탈성장 용어사전을 봐도 그렇다. 왜 그럴까? 내가 갖는 의문중의 하나다. ( 혹시 프랑스, 스페인에 뿌리를 둔 사람들의 편견때문일까?). 그런데 탈성장론의 대표적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앙드레 고르, 일리치, 카스토리아디스 등은 모두 폴라니와 깊은 가족 친화성을 가진 사상가들이다.
아래 글은 잘 알려진 "우리의 낡은 시장 심성- 문명은 새로운 사유패턴을 찾아야 한다" (1947)라는 논문(<거대한 전환>의 출간이후에 집필) 중의 핵심 대목이다. 이 글은,
1). 폴라니가 기술/디지털기술과 관련해 오늘날 탈성장론자들의 비판의 핵심을 선취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2). 뿐만 아니라 아래 서술은 "the reality of socieity "라는 소제목아래 쓰고 있어서 폴라니가 말하는 사회의 reality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잘 알려 준다.
[거대한 전환]을 읽고 있노라면 사회의 실재라는 말이 잘 와닿지 않을 때가 많은데 이 논문에서는 훨씬 더 명확하다.
3). 이 논문은 거대한 전환이후로 나아가는 폴라니 사유의 길의 시작을 잘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만년 폴라니의 기술문명의 어둠에 대한 비판은 캐나다시기 <자유와 기술> ( Rotstein과 대담집)에서 잘 나타난다.
4). 이 글에서 폴라니가 말하는 society는 사실상 민주적 사회주의의 society로 해석될 수 있는데 뷰러웨이가 끌어낸 사회 개념과는 다른 지점을 갖고 있다.
( * 폴라니의 사회개념과 진화, 2020.1.20 블로그 포스팅 ; 이병천, 칼 폴라니가 죽지 않는 까닭, 한겨레 칼럼, 2020.1.23 을 함께 참고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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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 동기들의 통일성을 회복할 것을, 그리하여 인간이 생산자로서 나날의 활동에서 활력과 열의를 불어넣기를, 경제체제를 사회안으로 흡수할 것을, 산업사회라는 환경에 맞게 우리의 삶의 양식을 창조적으로 적응시킬 것을 주창한다.
이런 모든 것들을 고려할 때 자유방임철학과 그 현실적 귀결인 시장사회는 무너지고 만다. 자유방임철학은 인간의 생명적 통일성 (vital unity)을, 물질적 가치에 경도된 “현실적 인간”과 좀 더 선한 “이상적” 자아로 찢어놓은 책임이 있다. 그리고 다소간 무의식적으로 “경제결정론”이라는 편견을 키움으로써 우리의 사회적 상상력을 마비시키고 있다,
자유방임철학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이미 지나간 산업문명의 시대에 끝이 났다. 그것은 인간을 가난하게 만든 (impoverishing) 댓가를 치르고 사회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삶의 충만함(fullness)을 인간에 되돌려 주어야 하는 과제와 마주하고 있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덜 효율적인 사회가 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Today, we are faced with the vital task of restoring the fullness of life to the person, even thougth this may mean a technologically less efficient society )
(Karl Polanyi, "Our obsolete market mentality- Civilization must find a new thought pattern" , 1947,1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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